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 역사, 남의 죄를 대신 뒤집어 써야 했던 '무고한 조선인'들은 지금까지 광복의 기쁨을 맞지 못하고 있다. 잘못된 역사 때문에 죽어서도 연금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인 戰犯'이 그들이다.
정창수씨(61, 양구군 동면 월운리)는 15일 "광복 79주년의 환희속에서도 죄없이 전범이 되고만 아버지의 유죄가 서럽다."고 하소연 했다. 끝내 누명을 벗지 못한채 지하에서 광복 79년을 맞아야 하는 아버지 정종호씨 때문이다.
1945년 5월15일 일제에 의해 포로감시요원 모집령이 떨어졌다. 남방전쟁에서 승승장구한 일본이 당시 포로로 잡은 연합군은 무려 27만여명 일본은 말레이 반도, 보르네오, 자바, 수마트라 등에 있던 포로수용소 관리를 위해 한국인과 대만인을 동원키로 했던 것.
말로는 자원이었지만 모집은 할당되 인원을 채우기 위해 반강제로 이루어졌다. 또 그해 5월은 징병제가 막 시작되던 때 전장으로 끌려가 죽는 것보다는 근속이 덜 위험하다 싶었던 정종호씨도 포로감시원을 택했다.
정씨가 배속된 곳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당시 일본은 포로의 인권을 명시한 제네바협약을 무시하고 연합군 포로들에게 가혹행위와 중노동을 강제했다.
1945년 8월15일 찾아온 일본패망과 조국 광복의 기쁨 그러나 한국인 포로감시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귀국이 아닌 감옥이었다.
일본군은 포로 학대는 자신들과 관계없이 저질러진 일이라며 발뺌했다. 조선인 148명이 전범재판에 회부됐다. 하소연할 길도 없이 그중 23명이 형장에 섰다. 나머지 125명에게는 종신형에서 징역 1년 5월이 선고 됐다. 그들 중 일본군 군인은 단 3명 뿐이였다. 정씨는 네덜란드 군사재판에서 5년을 선고 받고 인도네시아 지피앙형 형무소에 수갑됐다.
가혹한 복역생활로 폐결핵을 얻은 정씨는 출감 이후 일본병원으로 후송됐다가 1955년경 14년만에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내에게는 마을 입구에 효열비가 세워졌고, 지금도 역사속에 빚바랜 효열비는 아픈 기억을 말해주고 있다. 정씨는 1984년 고향 양구에서 작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