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9월 7일(양)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기 위한 목적 전투
경북 문경 가은 출신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가운데 한 분인 운강 이강년 의병장의 전투기록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강년 의병장의 독립운동이야 당초부터 널리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그가 문경새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개 문경지역에서 이강년 의병장의 의병항쟁은 전기의병 당시 농암면 개바우에서 벌인 친일관찰사 처단이나, 고모산성 전투, 후기의병 시기의 갈평 전투 승리 등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문경새재 지역 전투의 경우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이강년 의병장의 문경새재 전투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하나는 전기의병 시기인 1896년 2월 13일(음)의 일제의 보급선인 함창 태봉과 안보 사이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전투였고, 다른 하나는 후기의병 때 다시 창의해 1907년 9월 7일(양) 유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전투였다. 첫 번째 전투는 의병의 해산으로 이어졌고, 두 번째 전투는 이강년 의병장의 최대 승첩인 갈평 전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현재까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문경새재 전투지는 두 곳이다. 하나는 동원촌이 있던 곳이고, 다른 하나는 주흘루가 있던 주막촌이다. 현재의 위치에 비정해 보면 동원촌은 동화원이 있던 곳이고, 주흘루는 제 1관문의 주흘관을 말한다. 즉 전기의병 때는 동화원 일대에서 전투가 있었고, 후기의병 때는 제 1관문 주변에서 전투가 일어났던 셈이다.
따라서, 이강년 의병장은 의병항쟁을 이야기할 때 항상 첫 머리에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 계기는 1920년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에 계봉우가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의병전’을 연재할 때 이강년에 대해 ‘그 의기가 일호의 좌절함이 없이 각지 의려를 대연락하여 문경ㆍ영춘 각처에서 누십차의 대소전이 有하여’라고 그의 강경한 투쟁성을 논찬한 것이다.
또,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정부에서도 이강년 의병장의 독립운동에 나선 공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우선 1962년 3·1절에 최고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으며, 같은 해 6월에는 당시 문경에서 가장 번화한 곳 가운데 하나였던 가은역 앞에 이강년 의병장의 순의비를 세웠다. 이 비는 현재 운강 이강년 기념관 경내에 세워져 있다.
한편, 문경시에서도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이강년 의병장을 선양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또한 이강년 의병장이 태어난 가은에는 운강이강년기념관이 있어 선양사업을 주도하고 있으며, 문경시에서는 금년에 기념관을 리모델링해 새로운 전시 콘텐츠를 제공할 예정이다.
또, 이러한 상황에 발맞춰 향후 문경새재도립공원 안에도 안내판 또는 기념물 설치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며, 또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이강년 의병장을 우리가 앞장서 선양해 나가는 것은 문경시민으로서의 애향심과 애국심 고취에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아일보] 문경/김병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