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현대판 '디아스포라' 전향란씨
(7) 현대판 '디아스포라' 전향란씨
  • 주장환
  • 승인 2014.07.22 18: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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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하는 조선족 이민 3세입니다"

 
뿌리나 정체성 따지기 보다 지금의 현실이 나의 삶
중국-일본을 거쳐 한국에 정착, 새로운 삶에 눈 떠

구로 가리봉동, 대림 중앙시장 등 중국 교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북한 사투리까지 뒤섞여 귀가 즐겁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손님도 대부분 중국에서 온 동포들이다.

붉은 페인트로 툭툭 강렬하게 써내려간 간판이며 연변 냉면, 길림 반점 등 타향에서 적적함을 견디기 힘든 중국 동포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양꼬치, 훠궈(중국식 샤브샤브), 빠오즈(만두 또는 진빵), 요우삥(油餠, 기름떡) 지엔빙(전병)등 특유의 향신료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에서 우리는 먼 우리 조상들의 냄새를 맡는다.

이런 시장통은 단순히 물건만 팔고 사고하는 곳만은 아니다. 그곳은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고향의 향수를 퍼 올리는 샘터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들 동포들은 휴일이면 이곳에 모여 고향 소식을 교환하거나 결혼식에 참석하고 향우회에서 그리운 얼굴들을 만난다.

▲ 전향란씨는 디아스포라의 상흔을 가지고 있거나 하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이민 3세이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 조선족인데 "나는 중국인" 주장

이방인! 그렇다 그들은 분명 한국 속의 이방인으로 그 이름은 조선족이다. 현재 우리나라 법무부에서는 '한국계 중국인'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고국이지만 낯선 땅에서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결코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은 한국에서 더 나은 내일과 따뜻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일까?

전향란씨는 길림성에서 온 조선족이다. 그녀 나이 올해 마흔. 공자 말씀대로 라면 볼혹(四十而不惑)의 나이다. 그런 그녀는 왜 세상일에 혹하지 않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버리고 서울 하늘아래서 낯선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본지는 중국과 일본을 거쳐 마침내 우리나라에 정착한 현대판 디아스포라(Diaspora) 전씨와의 특별 대담을 통해 우리 시대 조선족들의 초상을 들여다본다.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을 떠나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전씨가 디아스포라라는 말에 선뜻 동의하지 않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말을 근원적 의미에서는 다소 어긋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 단어처럼 잘 맞아 떨어지는 말도 없다고 생각하여 디아스포라적 관점에서 대화를 풀어나간다.

전씨가 본사에 들었을 때 그녀는 약간 들떠 있었다. 낯선 땅에서 언론과의 인터뷰는 자신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다소 상기될 수 있는 일이다. 사진을 찍으려 할 때 "아! 화장도 하지 않았는데..." 하고 찐덥지 아니한 모습을 보인 것도 민낯(마음 속)에 대한 거북함이 표출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곧 바로 약간은 안쓰럽게 보는 한국인들의 기대감(?)을 깨는 자신감 넘치는 투로 대화를 전개해 나갔다.

그녀는 중국의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옥천태생이라고 했다. 옥천이면 충북이다. 그러나 그녀는 경남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경남이면 옥천과 비슷한 발음을 가진 경남 어디이거나 충북이라면 옥천이 분명할 것이다. 그녀는 옥천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간혹 아버지 이야기 속에서 파편처럼 남아 있는게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체성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녀는 선을 그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조선족은 한국인이잖아요?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길림성은 중국에 있고 중국의 일부라고 생각해 왔지. 한국인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전 중국인이라 생각해요.

그녀는 한국에 정착한 지금도 한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그리고 이토오 히로부미를 알 정도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한국인이신데 왜 그렇게 생각하신건지. 길림에서도 조선족 학교가 있지 않나요? 한족과의 차별대우도 만만찮았을텐데….

-모르겠어요. 민족의식이 없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중국에는 조선족 말고도 장족, 묘족, 이글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있어요. 그들도 모두 제각기 다른 나라가 뿌리죠.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듣고 보니 못 알아들을 바도 아니었다. 언젠가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 3세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 역시 한국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의 동화정책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은 그동안 한족 이주와 주민 교류를 통해 소수민족을 중국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펴왔다. 최근 이에 반발한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민들의 테러 등이 대표적 동화정책 반발 케이스다. 중국이 동화정책을 내세우고 있지만 차별은 여전하다.

▲ 한류는 조선족들에게 한국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줬다. 지난 14∼15일 중국 화북 5개 시·도 무용협회가 공동 주최한 '제7회 화북5성 시도 무용대전'에서 베이징수도체육대 무용단이 한국무용 소고춤 '환구'를 공연하고 있다.

■ 길림서 교편잡다 새 세상 만나

▲견디기 힘든 일이 많이 있나요?

-한족과의 차별이 많죠. 예를 들어 조선족은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될 수 없어요. 그 이유는 남북한과 중국 대표팀이 붙으면 중국을 배신하기때문이라고 해요. 다 핑계지요. 또 한족보다 체력이 약하다는 등 트집이 많아요. 경계하면서도 무시하고 또한 차별의 대상이기도 하죠.

▲문화혁명 때도 곱게 넘어가지 못했겠군요?

-그럼요. 저의 외할아버지가 돼지 한 마리를 기르고 계셨는데 '지주다, 반동이다'하고 몰아가서 견디다 못해 목을 매고 돌아가셨어요.

▲돼지 한 마리? 그 정도면 농촌에서는 대게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소도 아니고 돼지인데….

-그때 중국 농촌에서는 돼지 한 마리 기르는 집도 드물었어요.

▲그야말로 소가 웃을 일이군요. 아니 웃기엔 너무 잔인합니다. 그런데 왜 조선족 보다는 중국인화(化) 돼 가는거죠?

-차별이 싫고 대접도 제대로 받고 싶어서겠죠. 그리고 그때만 해도 어려서 그런지 민족이나 뿌리 뭐 이런 거창한 담론을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마오저뚱(毛澤東)의 영향은 좀 받았답니다.

▲그래요. 거 놀라운 일이네요. 문화대혁명으로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산림을 황폐화 해 놓은 좋지 못한 기억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개혁 정책인 대약진 운동은 실패로 끝난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평가받고 있잖아요. 일부에서는 중국 전체 경제, 문화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공산당 정부의 마오저뚱 우상화 교육때문이었겠지만 소학교 시절 해방의 은인으로 존경을 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공(功)이 70% 과(過)가 30%라고 생각하는 편이예요.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인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달성한 것 등 긍정적인 면도 많아요.

그녀는 길림대학을 졸업하고 1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공산주의 나라 중국에서도 돈은 생명줄이었다. 그녀는 1년간 월급을 못 받았다. 더 이상 머무르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그녀는 천진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국의 현대전자에 입사해 총무와 인사 관련 업무를 맡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세상에 눈뜨게 됐다고 회상했다. 말하자면 현대전자가 전향란이라는 한 여자의 '줄탁동기(啐啄同機)' 역을 해 준 셈이다.

"놀라웠어요. 한마디로, 야! 이런 세상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더 큰 세상을 향해 달음질 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컴퓨터와 일어회화 등을 배웠죠. "

그리고 그녀는 이번엔 일본으로 떠난다. 마침 일본인과 결혼한 언니의 초청을 받을 수 있었다. 후쿠오카에 발을 디딘 그녀는 어학원에서 일어 공부를 시작하는 한편, 회계전문학교를 다녔다. 그 사이에 대만, 한국 등과 무역을 하는 회사에 취직해 국제적 시야도 넓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한국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한국이야말로 어쩌면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포용해 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영어 등을 배우는 사이트에 접속하게 됐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도 했다. 그녀는 다니는 일본회사를 그만두고 올 1월 입국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이 어떠하던가요? 어머님 품 같은 느낌이 있었나요?

-에이, 그런 건 없었고요. 급하고 참을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편한테도 1분만 참으라고 이야기 한답니다.

▲중국인들의 특성을 한 마디로 '만만디(慢慢的)'라 그러잖아요. 영향을 받았나 봐요?

-그건 그렇지 않아요. 중국인들도 해야 할 일은 바로바로 해요. 특히 개방이후에는 스스로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립심이 앙양됐어요. 한국엔 택시나 버스들이 무서워요. 중국은 신호체계가 잘 발달돼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크게 나지 않아요.

▲흠, 나쁜 것만 봤군요. 일본인들은 어때요?

-불만이 있어도 참는 것은 배울만해요. 거리도 깨끗하고 숲도 많고, 속마음이야 어떻든 공손해요.

▲아무튼, 한국이 제일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호호. 꼭 그런 건 아니죠. 좋은 것도 많지만 꼬집어서 얘기하다 보니 그런거죠. 한류열풍이 대단하잖아요. 그 덕에 어깨에 힘을 좀 주기도 하죠.

▲ 조선족 동포들이 병에 걸려도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전향란씨는 뿌리보다는 현실의 삶이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한다.

■ 스스로 변신하면서 자립 노력

▲동포 만나시려면 가리봉 등에도 가야하잖아요. 동포분 들 자주 만나시나요?

-가끔 보죠. 모두 열심히 노력하는데 중국에서의 생활태도와 달라진 점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저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 중입니다.

▲ 그래요? 뭘 하고 싶은가요?

-조선족 동포들이 병에 걸려도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녀는 삼성화재 희망비전지점 보장컨설턴트다) 중국에서는 한국과 같은 의료혜택을 받기가 힘들거든요. 한국에 와서 병을 고치도록 돕거나 한국에서도 사회보장 혹은 보험에 대해 잘 몰라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 문화적 차이는 못 느꼈어요?

-왜요, 많이 느끼죠. 얼마 전 술자리에서 "부어드린다"고 했다가 "따라드린다"고 해야 한다는 충고를 받기도 헸답니다.

그녀는 우리가 흔히 추정하듯 이산병을 앓고 있거나 디아스포라의 상흔을 가지고 있거나 하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이민 3세, 그리고 급속하게 현대화로 진행되는 중국에서의 사회현상에 맞춰 스스로 변신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 또 한 명의 조선족일 뿐이었다.

그녀에게 역사의 희생자라 딱지를 붙이는 것도 언감생심이었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한국에 와서 살기가 쉽지 않는 일이지만 그것 역시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 여긴다. 그녀는 한이나 그리움을 절절하게 쏟아내며 핏줄이니 뿌리니 정체성이니 하는 담론을 담고 살아갈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열린 민족주의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을 보듬어야 한다는 거대 담론이 자칫 감상주의에 빠질 가능성도 있음을 우린 이민 3세대들에게서 본다.

세대 간 민족교육의 단절 현상 등으로 인하여 젊은 세대의 민족정체성 약화는 막을 수 없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민족공동체 유지, 발전에 어려움이 더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디아스포라의 희생자들의 귀국에 대한 편의 제공이나 국적 혹은 영주권 부여등과 더불어 이민 3세대들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