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宋)씨의 시조는 당나라 호부상서였던 송주은
송시열·송준길·송규렴·송병순·송원영·송건호 등 우리나라 모든 송(宋)씨의 시조는 당나라의 호부상서였던 송주은이다.
그 후 고려 때 그의 후손 송자영이 송유익(여산군), 송천익(은진군), 송문익(서산군) 등 3형제를 두었다.
이들이 송씨의 3대 산맥을 이룬다.
은진송씨는 이들 3형제 중 둘째 송천익의 후손이다.
그러나 송천익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되는 바람에 고려 때 판원사를 지내고 은진군에 봉해진 송대원(宋大原)을 시조로 한다.
은진은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의 지명이다.
주요파는 ▲목사공파 ▲정랑공파 ▲사직공파 등이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조선조 5백년 역사에 우뚝 선 거인이다.
그는 조선조 왕조실록에 가장 많은 이름이 나오는 인물이다.
우암은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의 네 임금을 섬기며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고 서남노소 분당의 난세를 살았다.
우암은 영조와 정조 이후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사상적 지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구축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지문 문제로 노론·소론으로 분당되어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의 문하에서 한원진, 윤봉구, 이 간 등 이른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가 나왔다.
이들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주자학적인 정치, 경제, 사회사상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정통적 흐름으로 이어졌다.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은 송시열과 함께 당대를 대표했던 성리학자였다.
송준길은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김자점을 탄핵하여 청서파의 집권을 가져오게 했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숙질(송준길이 아저씨) 간으로 두 사람 모두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다.
노론의 쌍벽으로 문묘에 함께 배향됐다.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송규렴은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졌던 대문장가다.
그의 아들 송상기도 송시열의 문인으로 숙종 때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송병준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으나 실현되지 않자 음독 자결했다.
그의 동생 송병순도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다 역시 음독 자결했다.
현대인물은 송인상(법무부장관), 송진백(제헌국회의원), 송원영(국회의원), 송효순(국회의원), 송장헌(대한의사협회장), 송석하(육군소장), 송기철(경제학박사, 고려대교수), 송민호(문학박사, 고려대교수), 송재만(고려대교수), 송명관(변호사), 송건호(한겨레신문대표이사), 송효빈(한국일보논설위원), 송희빈(충청은행장), 송재오(국민은행장), 송진혁(중앙일보논설위원), 송천영(국회의원), 송병학(충남대교수), 송재영(충남대교수)씨 등이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항렬자는 26世 인(寅), 27世 현(顯), 28世 의(義), 29世 범(範)이다.
집성촌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 평촌리, 전남 진도군 조도면 관사도리,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 경남 남해군 삼동면 남음리, 경남 남해군 남면 덕월리, 경남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경남 합천군 대양면 유전리 등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296명이 있다.
문과 78명, 무과 1명, 사마시 216명, 음양과 1명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은진송씨는 1985년에는 총 42,972가구 179,261명, 2000년에는 총 64,590가구 208,81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가구 수는 2만2천여 가구가 늘었으며 인구는 2만8천여 명이 늘었다.
서울 38,908명, 부산 21,454명, 대구 10,524명, 인천 9,326명, 광주 1,950명, 대전 23,903명, 울산 5,704명, 경기 35,270명, 강원 5,434명, 충북10,601 명, 충남 8,574명, 전북 4,256명, 전남 3,044명, 경북 10,488명, 경남 18,767명, 제주 613명이다.
대전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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