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개정 표준거래계약서 ‘비판’
공정위, 개정 표준거래계약서 ‘비판’
  • 박재연 기자
  • 승인 2013.06.09 17: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갑-을 “뭐가 바뀌었나?”… 정부 정책과 엇박자

공정거래위원회가 백화점·대형마트 등 대형유통업체와 입점업체 간의 불공정 관행을 개선하겠다며 발표한 표준거래계약서 개정안에 ‘갑’과 ‘을’ 표현을 그대로 사용해 최근 정부가 강조한 정책과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7일 공정위가 발표한 표준거래계약서 개정안에는 대형유통업체를 ‘갑’, 입점업체를 ‘을’로 지칭하고 있다. ‘갑’과 ‘을’은 본래 거래 계약서상 계약당사자를 일컫는 의미이지만 거래상 우월적 지위에 있으면 갑으로 반대의 경우, 을로 변질돼 갑을 관계 청산에 앞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분위기이다.
특히 이번에 발표된 개정안은 ‘갑의 횡포’에 제동을 걸기 위한 조치라는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백화점 등 대형유통업체들의 매장 내 인테리어 비용 떠넘기기는 그동안 대표적인 ‘갑의 횡포’ 중 하나로 손꼽혀왔다.
때문에 최근 갑을 관계가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자 백화점, 대형마트, 정부 부처 등이 자진해 갑을 표현부터 없애겠다고 나섰다. 계약서상 이런 표현이 부정적인 의미로 변질돼 기업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어 표현부터 바꿔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겠다는 것이다.
현대백화점은 지난달 10일부터 모든 계약서에 사용하던 ‘갑’과 ‘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백화점’과 ‘협력사’로 쓰도록 했다.
이외에도 롯데백화점은 협력사를 ‘갑’으로 표시하기로 했고, 신세계백화점은 2001년 7월부터 ‘갑’과 ‘을’ 대신 구매자와 공급자 또는 임대인, 임차인으로 쓰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은행권은 물론 정부 부처에서도 일고 있다. 제1금융권 은행 일부가 지난달부터 계약서상에 ‘갑’과 ‘을’이란 표현을 삭제하고, 대신 기업명 전체를 표기하기로 했고, 반대로 은행을 ‘을’로 표기하는 곳도 있다.
정부 부처 가운데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처음으로 지난달 10일부터 모든 연구개발(R&D) 협약서상에 포함된 ‘갑’, ‘을’, ‘병’, ‘정’ 호칭을 삭제키로 했다. 고용노동부는 ‘갑’과 ‘을’이라는 용어를 없애고, ‘사업주’와 ‘근로자’라고 쓰기로 했다. 국방부와 국회사무처도 동참에 나섰다.
일각에선 ‘갑’과 ‘을’이라는 표현이 사라진다고 문제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미 이같은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발표한 업체에서는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민감한 시기인데다 권고사안이라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이를 어길 경우, 대규모유통업 위반으로 공정위로부터 제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갑을 표기는 편의상 사용한 표현이지 다른 의미는 없다”며 “수개월 전부터 해당업체와 관련 사업자단체 등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해 표준거래계약서 개정안 초안을 마련했기 때문에 이미 충분한 이해와 설명이 이뤄졌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