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고려 말 유학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스승님께서 가끔 하시는 말씀 중에 “부모는 자식이 출세해야 훌륭해 지고, 스승은 제자가 훌륭해야 빛나는 법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공자도 제자 덕분에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이다.
어찌 당신께서 빛나고자 했던 말씀이겠는가. 그러나 저러나 아직도 절절매며 공부하느라 백면서생 자리도 마땅하다 싶으니 스승님께는 면구스러울 따름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 태종 이방원의 《해가》에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此亦何如彼亦何如), 만수산 드렁 칡이 얽어진들 어떠리(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했다.
또한 정몽주는 《단심가》에서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돼 넋이라도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라고 했으므로 그를 절개가 빛나는 유학자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그의 오랜 벗이었던 정도전 역시 계속 그를 찾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며 설득했으나, 그는 협력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 향한 일편단심이 누구를 향한 것인가를 다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정몽주는 우왕의 왕비 중 한명인 의비(懿妃)의 동생 노구산(盧龜山)의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눈감아주며 합격시켜주는 행위를 했다.
그리고 당대의 권력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에 성대한 만찬과 연회를 베풀기도 했고 우왕, 이성계 역시 그의 집에 찾아가 연회를 즐겼다는 등은 정몽주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를 갖는다.
정몽주는 1392년의 역성혁명에는 반대했으나,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데 가담했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를 등극시킨다.
그리고 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해 그들을 신돈의 자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을 때 정몽주 역시 동의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주장한 일편단심이나 성리학적 충효 사상과도 모순되며 목은 이색이 유배된 우왕을 몰래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과도 대비된다.
공양왕을 옹립할 때도 정몽주는 적극 찬성한 공로로 그는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영서운관사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익양군 충의군에 봉해졌으며 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에 책록 됐다.
역적을 토벌한 공로가 아니라 한 임금을 폐하고 다른 임금을 옹립해 공신이 됐다 그러면 어찌 정몽주는 만고의 훌륭한 학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조선을 건국하는데 반대했으나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의 폄하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현양했으며, 후일 사림파의 집권 이후에도 그들의 정치적, 학문적 선조인 정몽주에 대한 현양이 필요해 그에 대한 현양과 성인화는 계속 이어져오게 됐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간신으로 규정됐던 정몽주는 태종대에 이르러 충신으로 변신하고, 이어 사림파들이 장악한 중종 때는 문묘에 종사해야 할 유학의 종장으로까지 추대된다.
정몽주의 제자는 길재, 이숭인, 권우 등으로 권우는 후에 세종대왕의 스승이 됐고, 길재는 김숙자 뒤로 김종직에게 이어지는 사림파의 태두를 형성했다.
이는 성리학을 조선 유학의 적통으로 삼으려는 사림파들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항하는 훈구파는 정몽주가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폈지만, 결국 사림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중종 12년에 정몽주는 문묘에 종사된다.
결국 스승의 스승을 윗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학문적 영욕을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정몽주가 간신이든 충신이든 추앙되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마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요구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렇듯 역사적 인물 평가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주목받고 어느 날 문뜩 잊혀지는 대중스타와도 어쩌면 닮은꼴인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대중에게 멀어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뒷전이고, 보이는 화려함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대중들의 취향은 아침저녁으로 변하고 만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지 간에 늘 기억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관심 받고 싶은 인간의 속성을 어찌 탓하기만 하겠는가. 부귀하기를 탐하는 것은 누구나가 바라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진정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겐지. 오늘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탓하며, 세상은 불공평하다며, 기약 없는 내일을 기대한다.
그러나 어느 구름에 비가 들어 있을지 모를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저작권자 © 신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