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고아, 김해허씨 3대 옥당· 4대 문과 집안
선산 고아, 김해허씨 3대 옥당· 4대 문과 집안
  • 이 택 용
  • 승인 2012.07.2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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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허씨는 시조인 허염(許琰)이 가락국 태조의 수로왕비인 보주태후 허황옥(許皇玉)의 성을 따라 허씨로 하였다고 한다.

고려 문종때 탄생해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으며, 5세손 허유전(許有全)은 시호가 충목공으로 충렬왕조에 감찰어사로 국자사예전조시랑(國子司隸銓曹侍郞)를 지냈고 도첨의참리밀직사사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으며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에 올랐고 충숙왕때 정승을 역임했다.

허유전의 증손자 허치가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사간원 정언 재임시절인 1444년(세종 26) 함길도의 행성 쌓는 일을 정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성을 쌓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가뭄을 만나 억지로 쌓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바가 아닙니다.

또 진(鎭)의 백성들은 새로 옮겨 간 지가 오래 되지 않아서 이미 금년에는 다 쌓을 수 없는 일이니, 우선 풍년 들기를 기다려서 쌓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백성의 부역을 덜어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바른 소리를 하는 선비였다.

그 후 사간원 헌납,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기에 제학공파(提學公派)라 칭하고 파조이며, 묘는 용인에 있으며 부인 전주최씨의 묘갈은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한 최응룡이 찬했다.

영남의 선산(善山) 인물이다.

따라서 허치의 자 허선(許?), 손자 허정(許禎), 증손자 허백기(許伯琦)로 이어지는 명문가문이다.

특히 이 가문은 3대 옥당(玉堂)이다.

즉 허치, 허선, 허정 3대가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직제학으로 근무하였기에 ‘3대 옥당’이라 칭했다.

또한 허치, 허선, 허정, 허백기로 이어지는 4대가 문과에 급제하였기에 ‘4대 문과’ 집안이라고 말한다.

이 가문은 선산고을의 조선 전기에는 3대 옥당, 4대 문과 집안은 유일무이하다.

허치는 1438년(세종 20) 식년시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직제학 벼슬을 거친 후에 말년에 입향하여 선산에 명문가를 이루었다.

허선은 1432년(세종 14)에 태어났고 자는 자술이다.

1456년(세조 2) 식년시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열, 장례원 사평, 성균관 학정, 병조정랑, 이조좌랑,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했으며 세조대왕실록 편찬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허정은 자가 희인이다.

1494년(성종 25)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 청주목사, 영천군수,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허백기는 1493년(성종 24)에 출생하고 자는 여진, 호는 삼송, 호재이며 시호는 정헌이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1513년(중종 8) 식년 진사시를 거쳐 1519년(중종 14) 기묘별시로 문과급제한 뒤 예문관 사관과 승정원 주서가 되고 호당(湖堂)에도 근무했다.

1524년(중종 19) 형조와 병조좌랑을 지내고 1526년(중종 21) 형조정랑, 1528년(중종 23) 경상도 도사, 그리고 이듬해는 진위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1년(중종 36) 사헌부 헌납, 사헌부 장령을 거처 1544년(중종 39) 사간원 사간, 홍문관 교리, 승정원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참의를 거처 1552년(명종 7) 충청도 공주목사 때에 김정선생의 충암집을 간행을 주관하고 발문을 썼다.

1553년(명종 8) 장례원 판결사를 지낸 다음 첨지중추부사를 거쳐서 1562년(명종 17) 동지중추부사로서 관직에서 물러나서 1563년(명종 18)졸하였으며 묘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 있다.

그는 15, 16세기의 명신들이 전시에서 작성한 책문(策文) 가운데 우수한 것들을 뽑아 편찬한 전책정수(殿策精粹)란 책에 습상책(習尙策)이란 책문이 있으며, 기묘사화에 관련되어 자손이 경기도 용인에 숨어 살아서 현재 후손들이 경기도 용인에 터를 잡아서 처인구 관내 고림리, 갈현리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허치의 둘째아들 허량(許諒)은 자가 학고이며, 호는 송재로 진사시에 입격하고, 밀양교수를 지냈다.

선산 해평에 거주한 선비로서 용암 박운(朴雲)의 외조부이다.

아들 허유(許裕)도 연산조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훈도를 역임했다.

셋째아들 허흔(許?)은 1468년(예종 즉위년)에 태어나서 진사시에 입격했고, 아들 허비(許裨)는 유학자이며 그 후손들은 선산 고아읍 파산리에 거주하고 있다.

조선전기에 이렇게 명문가로서 선산의 학풍을 주도하던 문중이 현재는 많이 떠나고 고아 파산리, 해평 괴곡리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구미시 선산유림은 이 문중의 내력을 알아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