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 진주지역의 가문과 인물 거의 망라
진주문화연구소의 ‘진주학총서’ 세 번째 책
경상국립대학교(GNU) 경남문화연구원 박용국 교수가 '여말선초 진주지역의 가문과 인물'을 발간했다. 이 책은 진주문화연구소의 ‘진주학총서’ 세 번째 책이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여말선초 진주지역의 주요한 가문으로는 진양하씨 시랑공파 가문, 진양하씨 사직공파 가문, 진양정씨 여러 가문, 경주정씨 가문, 삭녕최씨 가문, 고령신씨 가문, 고성이씨 가문 등 18개 가문이고, 진주지역 인물과 논거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215명에 이른다.
내용은 진주지역 토성이족의 사족화, 사족 가문의 정치·사회적 성장, 사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변화로 이루어져 있다. 세 부분으로 구성된 모두 9편의 논문을 통해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친 진주지역의 사회변동을 가문과 인물 및 마을을 중심으로 규명했다.
Ⅰ부 ‘진주지역 토성이족의 사족화’에서는 정지원과 정여령, 강창서를 다루었다. 세 인물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왕도 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정지원은 고려 문벌귀족 최고 전성기 때 과거에 급제하여 간관(諫官)으로서 임금에게, 최고 권력자에게 직언을 삼가지 않았던 강직한 인물이다. 정지원은 불의에 맞서 끝내 타협하지 않았던 진주 정신을 실천에 옮긴 인물로 여겨진다.
그의 묘지명에는 그의 본관이 진양이라 했는데, 이는 진주의 별칭인 ‘진양’이 가장 이른 시기에 쓰인 사례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정지원의 외후손이 미수 허목이다.
12세기 중엽에 활동한 정여령이 재상 이지저(李之氐, 1092~1145)의 권유로 ‘진주산수도’를 짓자, 좌중의 사람들은 그 정밀하고 민첩함에 감복하였다고 이인로의 '파한집'에 전한다.
500여 년 후의 진양정씨 은열공파 가문의 팔송 정필달에게 빼어난 인걸로 기억되었다. 하지만 그가 진주의 진양정씨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팔송 정필달 이후 진주지역에서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이가 더 이상 없었다.
1211년 과거에 장원 급제한 강창서는 어려서 진주향교에서 학업에 전념하여 글을 잘 지었다. 그리하여 강남(江南)의 학자 가운데 그보다 더 뛰어난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당대에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1685년에 남한산성 천주사에서 간행된 '남한보(南漢譜)'에 의하면 1211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강창서는 고려 말기 이후 최고의 명문(名門)으로 이름난 진양강씨 박사공파 강시-강회백 부자 가문의 직계 조상으로 조선 중기까지 알려져 있었다. 물론 조선 중기 이후 그 세계가 거의 부정되었다.
Ⅱ부 ‘사족 가문의 정치·사회적 성장’ 편의 ‘고려 말기 하즙 가문의 정치적 성장과 성격’, ‘태종대 하륜의 정치적 존재 양태의 변화’, ‘진주 사곡 출신 하경복의 생애와 벼슬살이’는 진주지역 재지세력의 가문과 인물을 통해 정치·사회적 성장을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원정공 하즙은 지금은 산청군에 속하지만 1906년까지 진주에 속했던 여사촌(남사예담촌) 출신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가계는 이후 조선 세종 때 영의정 경재 하연에 이르기까지 4대 100년에 걸쳐 끊임없이 재상을 배출한 집안 출신이다. 하즙의 아버지 하직의에 대해 진양하씨 사직공파 족보에서는 무과에 급제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서 그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에 나아가 무반의 관직을 지냈음을 밝혔다. 하즙의 둘째 아들로 통정공 강회백의 외숙인 국일도대선사 원규는 진주 지리산 단속사에 주석했던 인물로서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름만 전해지던 승려 원규의 존재에 대해 이 책에서 처음으로 그가 대선사 지위의 최고 선승이었음을 밝혔다.
너무나 잘 알려진 호정 하륜이 태종대에 어떠한 정치적 존재 양태였는가를 두 사건을 통해 밝혀서 그가 얼마나 권력을 자제하고 청빈했던가를 밝히려고 했다. 태종은 하륜 생전에 신하라고 일컫지 않고 항상 빈사로 대우했다.
양정공 하경복은 세종의 깊은 신임을 받아 1422년 윤12월 함길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10년 내리 북쪽 변경을 아무 탈 없이 지켜 4군 6진 개척의 토대를 닦아 재상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세종은 1426년에 이르러 하경복을 장성처럼 의지하게 되었다고 했다.
Ⅲ부에서는 여말선초 진주지역 사회변동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로’에 주목하고자 했다. 또한 전체사 또는 민족사 차원에서 소홀했던 마을 단위의 사족 형성과 변화 양상에 관한 실증적 연구의 일환으로서 진양하씨 시랑공파 가문의 세거지인 당남리·사곡마을과 삭녕최씨 가문의 최복린이 입향한 조동리를 중심으로 그 사실을 검토하려고 했다. 아울러 조선 초기 고령신씨 가문의 신필이 조동리에 입향하게 된 배경을 규명했다.
진양하씨 시랑공파 가문의 청천군 하을지는 1344년 장원 급제하여 장상(將相)에 올라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에 대한 고려사의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목은 이색은 ‘진양하상국(晉陽河相國)’이라는 시에서 하을지를 두고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칠 적 모두 어질다 추앙했네.”라고 했다. 삼봉 정도전도 한때 하을지를 높이 받들며 따르고자 했다.
13세기 이후 대내외적 배경을 바탕으로 진주지역에서는 문사(文士)로 일컬어질 수 있는 문인지식층(文人知識層)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1376년 무렵 ‘진지문사(晉之文士)’라 일컫는 집단이 시가(詩歌)를 짓고 이를 편집하자, 정도전이 시서(詩序)를 지어 바치는 일도 있었다. 호정 하륜의 아버지 하윤린이 그러한 지식인층을 조직화하였던 게 금강사이다. 금강사 구성원이 바로 부로(父老)였다.
여말선초 진주지역 사족 가문들의 급격한 정치적 성장과 사회적 위상 강화는 경주정씨 정진, 삭녕최씨 최복린, 전주최씨 최득경, 밀양손씨 손수령, 재령이씨 이혜, 양천허씨 허영, 고령신씨 신필 등 다른 지역 사족 가문 출신의 인물들을 진주지역으로 끌어들이는 구심력으로 작용했다. 이로써 진주지역의 향촌공동체 구성원의 성격에 처음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초 부로들은 촉석루 중건만이 아니라 남강의 범람으로부터 전민(田民)의 보호와 안정적인 농업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한 남강의 방천(防川) 축조를 주도하고, 진주목사와 함께 남강의 물을 관개수로 활용하기 위한 수차(水車) 보급에도 앞장서는 등 향촌공동체의 경제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신아일보]경상국립대/ 김종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