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작년 12월 “한국의 방송은 민주주의의 적이다”라는 제목의 컬럼을 한겨레에 기고한 바 있다. KBS와 MBC가 지난 2개의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는 문제를 넘어서 국민의 미성숙 상태를 영속화하려는 조직으로 퇴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영방송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라는 1986년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제시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이제 긴 파업을 끝내고 한국 민주주의의 동반자로 거듭날 수 있는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은 다행이다.
김누리 교수의 컬럼을 인용한 것은 최근 언론의 보도행태가 동일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국내 언론은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둘러싼 일련의 남북대화와 상호 실무점검 방문을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그 보도 내용과 방식이 참으로 개탄스러웠다. 평창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남북한 긴장완화라는 국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시대의 변화, 미디어의 변화, 시민의식의 변화가 진일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보도의 방식과 시각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의 예술단 공연의 사전점검 방문에 대한 보도는 파파라치의 스토킹에 가까웠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언론으로 평가할 수 있는 품격도 기본도 없었다.
언론이라는 것이 “응당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양보해 보더라도, 그 내용에서 어떠한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짜리 목도리, 무엇으로 만든 명품 핸드백, 체중변화, 커피취향, 몇% 부족한 패션 감각, 무슨 식사를 했는지 등 뉴스이용자들은 눈과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요즘 세태를 나타내는 말로 “뭣이 중헌디?”가 저절로 나오는 보도이었다. 견월망지(見月忘指), 달을 보라는데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보는 격이라는 사자성어를 쓰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보도방식에 대해 비판이 오랫동안 지속됐지만,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언론들이 사회구성원들의 정신적 성숙을 가로막고 있고, 결과적으로 이들이 한국 민주주의의의 적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산에 오르면 아름다운 산하만이 보이는데, 모바일앱 또는 텔레비전을 통해 뉴스를 보면 분단된 산하가 보이고 갈라진 한국사회만이 보일뿐이다. 언론은 최소한 국제행사를 앞두고 국익을 해치는 일에 스스로 앞장설 필요가 없어 보인다. 헌데 일부 주요 언론은 올림픽의 기본 정신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가치 판단을 애써 외면하고 있고, 주장의 일관성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평가를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론이 평화올림픽을 앞두고 최소한 국익을 위해 보도를 할 수 없는 것인가?
언론학계는 뉴스보도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통해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성장시키는 미디어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저급한 뉴스에 ‘시달리다’보니 미디어교육이 절실하다고 느껴진다. 헌데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국내 언론의 뉴스를 통해 좋은 미디어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지, 또는 신문을 읽으라고 권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명분과 실리의 지난한 싸움과 갈등이 현재에도 다른 이름으로 동일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는 분단 이후 이루어 놓은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과거의 낡은 이데올로기 수렁에 갇혀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언론이 이를 확대재생산하는데 나쁘게 기여하고 있다. “현 세대가 과거에 집착해 산다면, 미래 세대들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사소한 차이를 두고 당면토장(當面土墻), 서로 담벼락을 맞대고 말하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는 모습이 사라지길 기대해본다. 김누리 교수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한국의 언론이 더 이상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