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계란으로 바위치기
[기고] 계란으로 바위치기
  • 신아일보
  • 승인 2024.11.07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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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 스님
 

 자기 실력조차 가늠하지 않고 누가 보기에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싸움에 달려드는것을 주변에서 가끔본다. 의협심을 품고 거대한 정치권력에 맞서 단기필마(單騎匹馬)로 한목숨걸고 달려드는 민주투사가 있고 맨주먹 붉은 피로 한몸 받쳐 탱크를 저지한 우크라이나 전쟁터의 이름모를 병사도 있으며 한줌의 오합지졸과 정예오천기병을 막아선 장판교의 장비도 있었다. 자기 능력보다 훨등히 쎈 강적에게 달려드는것을 비유하는 말이 당랑거철(螳螂拒轍)이다. 혹은 당랑지부(螳螂之斧)라고도 하는데, 장자에 나오는 우화로‘수레에 맞선 사마귀’라는 말이다.

중국 제나라 임금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가는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치켜들면서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든다는 말이‘당랑거철(螳螂拒轍)’이다. 

"허 맹랑한 놈일세! 저게 무슨 벌레인고?”"사마귀라는 벌레입죠. 앞으로 나아 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을 모르는 놈입니다."
장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벌레가 사람이라면 용맹스러운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니 수레를 돌려 벌레가 상하지 않도록하라” 

장공은 미물이 앞뒤(前後)를 돌아보지를 않고 제 존재를 드러내어 달려드는 모습에서 진정한 용맹성을 본 것이다. 제가 가진 모든것을 버려 뜻을 세우고 구하는 일은 미물일지라도 기릴만하다. 

장자는“무실(無失)이면, 무득(無得)”이라고 했다던가.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얻을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매사에 물러섬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수레에 맞서는 사마귀의 어리석음이 밉지는 않겠지만,제 분수를 잊고 달려오는 수레를 막아선다면 그 운명은 어찌되겠는가. 어리석은 사마귀처럼 제 처지나 분수를 잊고 무모하게 대드는 사람을 빗대어 '당랑지부(螳螂之斧)' 라는 말도 생긴 것이다. 나서야 할 때가 있으면 물러설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아니면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지, 그 분별을 모르고 일삼아 억지로 나서면 화를 부른다. 

“훌륭한 장수는 섣불리 나서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궁구한다.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한 자 뒤로 물러난다.” 고 노자께서는 말한다. '기심화심(機深禍深)'이란 말도 있다. 배포가 크면 재앙도 깊다는 말로 크게 한탕해서 왕창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좋아 보여도 재앙의 기틀을 밟으면 돌이킬 수 없다. '경적필패(輕敵必敗)',모든 것을 가볍게 보지 말라. 오만은 반드시 망하는 법.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저항하지 않고,수레의 옆으로 피신한다면 살아남지 않을까? 좀 더 비약해서,독재자에게 저항하지 말고,독재자의 말을 들어주는 척 비위를 맞춘다면 제 한몸은 보신(保身)하지 않을까? 강한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론 국가의 권력이다. 청동기 시대에 고대 국가의틀이 형성되었으며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예리해진 칼과 수레를 끄는 말에 길들여진 백성이다. 전쟁에 끌려가 전선에서 말한마디 못하고 죽어나가야 하는 민초들은 누구를 위하여 죽어가야 하는 것인가?  기까이는 북한의 병사들은 누구를 위해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하나뿐인 고귀한 목숨을 받쳐야 할까?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것인가? 아님 돼지같은 수령을 위한 것인가?

수 많은 사마귀들이 수레에, 혹은 말을탄 장수의 칼에 말발굽에 깔려 죽었다. 일본제국시대 왜놈들에게 많은 독립투사들이 고문을 받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했다. 권력은 맞선다고 이길 수는 없다. 어쩌면 당시의 독립투사는 사마귀처럼 무모한짓이었는지도 모른다. 군부독재 시절엔 수 많은 민주화 인사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歷史)의 수레바퀴에 깔려 수 많은 민초들이 죽어나갔다.

그렇다면 역사는 과연 강한자들만의 편이었던가. 거대한 권력과 맞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감행한 나약한 이들을 과연 누가 기억해 줄텐가. 하지만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서 수레가 지나간 다음에 등장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먼 훗날을 기약하는 것은 오히려 현명한 짓이 아닐수도 있다. 그리하여 무모한 사마귀의 어리석음을 따르지 말 것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바이블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돌팔매질로 거인 골리앗을 넘어트린 어린 목동도 있었다. 물론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었다. 약자는 흔적이 없이 사라질 뿐인듯. 그러나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무모함과 거대한 수레에 맞서려는 사마귀의 용기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왜놈 치하에서 독립군들을 잡아 족치고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이 해방정국에서 단죄 되지 않았고 그 후손들은 호의호식을 하며 산다고 흑역사를, 단죄되지 않은 비굴한 역사를 경외할수는 없다. 강한 것에 굽히는 것이 오히려 현명할지도 모르지만, 정의란 척박한 환경에서도'계란으로 바위를 칠 듯'맞서 싸우려는 의지에서 바로 세워지는 것이리라.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늙은 백작은 인간성의 한계를 자각한 뒤에야 이렇게 읊었다. "눈이 보일 적에 나는 오히려 헛디뎌 넘어지곤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자는 조심하는 까닭에 넘어지지 않지만,눈 뜬 자는 오만함과 경솔함 때문에 작은 돌부리에도 넘어지는 법이다. 사람은 편안함 속에서 나태해지고,역경과 시련 속에서 단련된다는 것이다. 맹자에 나오는 '생어우환(生於憂患),사어안락(死於安樂)이란', 지금 어렵고 근심스러운 것이 나를 살리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금 편하고 즐거운 것이 나를 죽음의 길로 인도 한다고 말한다. 우환과 고통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성공을 찾아내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현재 척박하고 고단한 살림살이로 어려움에 직면한 민초들을 단련해주는 쇠망치질로 인해 번쩍 깨달아, 그제서야 인정물태(人情物態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세상 물정)의 진실과 거짓된 형상을 두루 알게 해 준다. 모진 운명을 체념해 순응한다는 것은“물 안에서 헤엄쳐야 할 제 운명을 원망하지 말고,극복함으로써 마침내 헤엄치기의 달인이 되는 것이다.

'연(鳶)'은 순풍이 아니라 역풍에 가장 높이 날고,바람개비가 돌지 않으면 아이들은 막 달리지 않던가,스스로 뛰어서 바람을 만든다. 당랑거철과 당랑지부의 두 힘을 균형 있게 조합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절이긴하다. 그러니 제 힘도 가늠하지 않고 적을 가볍게 보는 미물인 사마귀란 놈이 던져 주는 가르침이 매우 시의적절(時宜適切)하다. 

master@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