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원 기부.’ 웬만한 대기업 연간 매출 규모다. 우리나라 기업 중 연 1조원 넘게 기부한 대기업 총수는 없었다.
설 연휴 직전 카카오 김범수 의장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자신의 개인 재산 절반을 기부한다고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김 의장은 카카오 보유 주식만 총 10조원이 넘는다.
그럼에도 시기상으로 볼 때 의혹이 가는 건 사실이다. 지난달 김 의장은 아내와 두 자녀를 포함한 친인척 14명에게 카카오 주식 33만주를 증여했다. 김 의장의 자녀 2명은 케이큐브홀딩스에 직원으로 채용됐다. 사실상 카카오의 지주회사인 케이큐브홀딩스에 모든 친인척 가족들을 집합시켰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경영권 승계 및 지배구조 의혹 잠재우기 식 행위로 풀이했다.
하지만 설사 의도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김 의장의 통 큰 결단은 사회적 파급효과가 엄청났다. 실제 “한국판 빌게이츠 기부”라는 찬사까지 쏟아졌다. 재산 130조원여 중 90% 기부를 선언한 빌게이츠에 비유 됐다는 것만으로도 박수 받을 만한 일이다.
일부는 “김범수식 이익공유”로도 해석했다. 코로나19로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진 상황에서 먼저 솔선수범에 나섰다는 얘기다.
정치권 등은 현재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이익공유제’ 카드를 꺼내 들고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기업들은 대놓고 반대는 못하지만 정치권의 이같은 반강제적 사회환원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 의장의 행위는 국내 굴지의 대그룹 총수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익공유가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해 기업을 더욱 옥죄는 단초를 마련해줬다.
카카오는 재계순위 20위권이다. 김 의장은 국내 부자 톱5에 들었다. 즉 산술적으로 앞선 기업과 국내 부호들의 통 큰 기부가 기대된다는 얘기로 풀이된다. 기업분석 전문 한국CXO연구소 오일선 소장은 “이를 시작으로 깨끗한 부자가 되려는 분위기가 확산될지 지켜볼 대목”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세계부자 500위권에 오른 국내기업 총수는 6명이다. 이중 김 의장 보다 앞선 순위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김정주 넥슨 창업자다. 그 뒤로는 권혁빈 스마일게이트 창업자,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있다. 제2의 김범수가 될 수 있는 후보자들이다.
기업으로 보면 2019년 연간 기준 기부금 1위는 삼성전자다. 2878억원을 기부했다. 2위를 차지한 KT는 1000억원이 채 되지 않았다. 기업들은 기부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회공헌도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를 다 합친다 해도 1조원을 넘는 곳은 없다. 이들 기업들은 매년 수십조원, 많게는 100조원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다.
업계에선 환원은 ‘주주의 불만’과 ‘실적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는 핑계를 된다. 기부금은 실적에서 영업외 비용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주주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기부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총수들과 대기업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워해야 한다.